면역에 관하여

어떤 백신이라도 특정 개인에게서는 면역을 형성하는 데 실패할 수 있다. 인플루엔자 백신 같은 일부 백신은 다른 백신들보다 효과가 좀 떨어진다. 하지만 효과가 상대적으로 적은 백신이라도 충분히 많은 사람이 접종하면, 바이러스가 숙주에서 숙주로 이동하기가 어려워져서 전파가 멎기 때문에 백신을 맞지 않은 사람이나 백신을 맞았지만 면역이 형성되지 않은 사람까지 모두 감염을 모면한다. 면역은 사적인 계좌인 동시에 공동의 신탁이다.

집단의 은유를 벌집으로 바꾼다면,… 한 꿀벌의 건강은 벌집 전체의 건강에 달려있다. 꿀벌의 협동 작업은 집단적 문제 해결의 한 사례로서, 인간 사회도 사실은 그런 방식에 의존하고 있다는 게 서로위키의 주장이다.

세계적으로 COVID-19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벌써 죽은 사람만 수십만 명에 이르고 있으며, 앞으로 언제 종식될지 모르는 답답함이 마음 한가운데를 짓누르고 있다. 우리 집 아이는 영문도 모른 채 벌써 3개월째 유치원에 등원하지 못하고 집에 갇혀 답답해하고 있다.

중국에서 시작된 이 바이러스가 전 세계로 순식간에 퍼져버려 인명과 경제에 막대한 피해를 주고 있다. 집단면역 체계의 예에서 보듯 우리는 모두 떨어진 각 개인인 듯하나 서로 의존하며 하나로써 살고 있다. 한 개인의 불행이 거기에 그치지 않고, 우리 모두의 불행이 될 수 있음을 뼈에 사무치도록 경험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바이러스의 무기화도 언제든지 가능함을 의미한다. 실제로, 2012년 파키스탄은 미국이 드론 공격을 중단할 때까지 소아마비 백신 접종을 금지한 사례가 있다. 소아마비 바이러스를 확산시키려 하는 시도, 즉 무기화를 시도한 것이다. 한 개인의 고통은 모두의 고통이다. 한 국가의 몰락이 세계의 몰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해야 함을 의미한다.

2013년부터 대한민국에 ‘안아키’ 운동이 활발했던 적이 있다. ‘안아키’를 풀어쓰면 ‘약 안 쓰고 우리 아이 키우기’라고 한다. 약물치료나 예방접종을 거부하고, 대체의학과 자연주의란 명목 아래 아이를 키우는 운동이다. 물론 이로 인한 부작용이 사회적 문제를 초래했음은 물론이고, 아이들이 당한 고통 또한 매우 심각했다.

백신과 연관된 간접적 부작용은 무수히 많다. 가령 홍역-볼거리-풍진 백신은 고열을 일으킬 수 있고, 고열은 열성 발작에 취약한 아기에게 발작을 일으킬 수 있다. 이때 발작을 일으키는 것은 백신이 아니라 열이지만, <그리고 그 아기는 자연 감염으로 인한 고열에도 똑같이 발작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지만> 밥 선생님을 비롯하여 백신 부작용을 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태여 그걸 구분하지 않는다.

책에 미국에서 고학력 부모들을 중심으로 자녀들에게 수두사탕을 돌리며 수두파티를 행해왔던 일부의 행위가 소개되어 있다. 아마도 이런 행위들이 수입되어 한국에 퍼졌던 것이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런 일들의 근원은 기본적으로 완전하지 않은 백신에서 기원한다. 인간 대부분의 과학적 산물들이 그렇듯 100% 완벽하고 확실한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백신의 부작용으로 고열을 대표적으로 들수 있다. 아직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자폐 등의 심각한 후유증 또한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공포감이 확산되어 이런 운동이 근본적으로 근절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물론 백신이 특정 개인의 면역을 형성하는 데 실패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회 전반적인 백신 접종은 집단 면역을 일으켜, 사회 전체의 안정성을 높인다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행위임이 틀림없다. 즉 바이러스 등의 병원체가 다른 숙주에 침투하여 퍼져나갈 수 없도록 집단의 면역을 형성시켜 사회 전체의 안전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절반이 넘는 부모들은 백신으로 인한 심한 부작용을 걱정한다고 답변했다. 우리는 우리를 해칠 가능성이 가장 큰 것들은 오히려 겁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운전을 한다. 술을 마시고, 자전거를 타고, 너무 오래 앉아 있는다. 우리는 상어를 무서워하지만, 순 사망자 수로 따지자면 지구에서 제일 위험한 생물은 모기일 것이다.

말라리아에 대한 백신이 아직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매개체인 모기의 번식처를 파괴하고 없애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1900년대 초중반 미국에서는 이 방법을 위해 도랑의 물을 없애고 방충망을 보급했다, 또한 DDT를 각 가정의 벽에 바르고, 살포한 덕에 말라리아를 박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와 함께 DDT가 환경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고, 암이 발생한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었지만, 위험에 대한 공포심이 사회 전반에 퍼졌다. 결국, DDT 생산처는 더이상 찾기 힘들어졌고, 이를 살 돈마저 없는 가난한 나라에서는 아직도 수많은 어린이가 말라리아로 죽거나 심각한 장애를 입게 된다.

로젠버그는 <말라리아를 겪는 가난한 나라들에 벌어진 가장 나쁜 일은 부자 나라들에서는 그 질병이 근절되었다는 점일지 모른다>고 말했다.

나는 평생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전체의 부를 독식하는 것은 매우 지당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가난한 사람은 열심히 일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난해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런 처우를 당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했던 내 젊음의 오만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다.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 때문이 아니다. 그가 무너지면 나도 무너진다. 부끄럽지만, 내 이웃의 불행이 결국, 나의 불행이라는 현실이 나를 어느덧 타발적 이타주의자로 만들어가고 있다.

서민과 약자가 붕괴되는 것을 막으려는 각종 조치들이 한국과 세계 여러 국가에서 강력하게 시행되고 있다. 이런 정책적 조치들은 바로 이런 맥락과 일치한다. 물건을 팔아도 결국, 구매자가 있어야 팔수 있는 것 아닌가? 구매자를 죽이고 나만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라는 이해와 동의에 공감한다. 위기와 고난이 항상 나쁜 것이 아닌 것은 바로 이런 생각의 전환을 가능케 해주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자의든 타의든 어쨌든 우리는 남을 더욱 생각하며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는 상황에 부닥친 것 같다. 면역에 대한 치밀하고도 고차원적 율라 비스의 글을 읽으며, 남은 삶의 방향을 어디로 잡아야 할지 깊이 생각해볼 수 있었다.

[서로 의존하는 관계라고 생각해 봐. 우리 몸은 자기 혼자만의 소유가 아니야. 우리는 그렇지 않아. 우리 몸들은 서로 독립적이지 않지. 우리 몸의 건강은 늘 남들이 내리는 선택에 의존하고 있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지마, 요컨대 독립성이란 환상이 존재한단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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